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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2011/04/23 05:31

성상파괴자들

 

(387) 중앙집중적 권력을 분산된 라틴식의 정부 모델로부터 방어하고 또 동시에 어떠한 민주적인 정신이나 대중적 저항으로부터도 방어하기 위해 비잔틴에서 사용된 무기들 중의 하나는 신성한 이미지들의 금지, 즉 성상파괴였다.

(387) 성상파괴는 종교적 기획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획이기도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종교적인 기획과 정치적인 기획은 동일한 것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재현 자체의 힘이었다.

(388) 제국의 백성은 판토크라트의 그림을 즐기거나 초상들을 소유해서는 안 되었다. 신의 이미지를 경배하고, 그것으로 구원의 희망을 획득할 기회는 금지되었다. 초상에 의한 재현은 상상력의 가장 작은 모서리에서나마 신성한 것에 참여하고 신을 모방할 방법을 제공해주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미적 재현은 일종의 정치적 재현의 매체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성상파괴적 군주는 권력과 구원의 이 작은 기회조차 끝장내야만 했다. 바실레우스가 그들 사이의 유일한 고리, 구원의 유일한 수단일 수 있도록 신은 다중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야만 했다.

 

(388) 유럽 근대성의 해방적 전통은 부분적으로는 비잔틴 권력의 오만에 반대하여 세워졌던 것이다.

 

(388) 오늘날 제국적 주권의 정치 이론들은 비잔틴적인 잔인함으로 흘러넘친다.

(389)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이 절대적이고 자율적인 권력 개념을 재창출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는 주권 개념을 다시 한 번 제안하는 것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새로운 성상파괴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훨씬 던 복잡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성상파괴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성상애호가들(iconophiles)의 지위 또한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권권력은 바로 그 이미지들의 활용을 통해, 미디어들의 스펙터클을 통해, 정보의 통제를 통해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노력한다. 비잔틴의 다중들이 성상들에서 발견했던 희망과 구원의 요소가 이제 모든 이미지들에서 고갈되어버린 것 같다.

 

(389) 비잔틴의 성상파괴 논쟁은 종종 사본과 원본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플라톤 철학에 교부 신학을 결합시킨-논쟁으로 이해된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이와 달리 신의 육화(肉化)에, 그리고(물질적이기 때문에 재현될 수 있는) 살로 이루어진 신과 인간의 물질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논쟁은 확실히 신학적 맥락에서 수행되지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권력의 형상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인 것이다.

 

(389) 어떠한 주권도 상상력을 열어 자유에 대한 사랑에로 이르게 하는 성상들을 제거하도록 허용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어떠한 주권도 다중에 속하는 희망과 구원의 매체를 깨뜨리도록 허용 받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주권이 폭군이 되고 주권의 권력이 완전하고 절대적이 된다면, 그렇다면 주권 자체가 공격받아야 하고 파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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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ipsymoon
글쓰기2011/04/16 13:15

(2009.6)

박쥐는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자유로운 이미지보다는 오직 자신의 이익에 치우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래서 박쥐는 동물 우화에서 유일하게 쫓겨난 동물이기도 하다. 박쥐는 유일하게 날 수 있는 포유류이지만 그 날개는 다른 생에 치명적이며, 그래서 박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반면 뱀파이어는 매우 매혹적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치명적이게 될 때는 말뚝으로 저지해야 하지만 어쨌든 뱀파이어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매우 우아하다. 뱀파이어의 힘과 능력은 아름다우며 위협적이다. 그런데 그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뱀파이어가 박쥐로 뿅 하고 변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갑자기 그 공포가 잊혀지고 피식 웃음이 나고야 만다. 영화의 제목이 뱀파이어가 아니라 박쥐인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또한 동시에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thirst’ 즉, 목마름, 갈증, 갈망 등의 뜻을 가진 말이기도 하다. ‘박쥐’와 ‘갈증’은 마치 서로를 보완해주고 있는 제목 같다. 박쥐가 우리의 발가벗겨진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면, 갈증은 그만큼 우리가 애타하는 욕망을 생각나게 한다. 박쥐는 우리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갈증 앞에 솔직해졌을 때 그것은 생을 파괴하기에, 우리는 뱀파이어가 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갈증을 포기할 수 없어 대신 우리는 박쥐처럼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자신을 변호하며 목을 축이고는 하는 것이다.

상현의 욕망 : 박쥐의 욕망은 갈등한다

아프리카에서 기도하듯이 상현은 모두가 혐오하는 가장 밑바닥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화답은 모든 욕망을 알고 그것을 취할 힘을 가진 뱀파이어로의 환생이다. 그의 환생은 성스러운 듯하지만 매우 속된데, 그의 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흡혈하고 그렇게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그를 향해 구원의 희망을 품을 때, 그것은 파멸을 향한 기도인 것이다. 상현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소원하던 대로 가장 더러운(?) 존재가 되었으니 그는 어떻게 여기서 구원을 일굴 수 있을까?

상현은 우연히 어릴 적 친구 강우와 그 엄마 라 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 거의 갇혀 사는 강우의 부인 태주를 만난다. 상현은 그녀에게 끌리며 그녀를 구원하려 한다. 그리고 강우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상현은 그렇게 자신의 저주받은 환생도 구원한다. 그러나 상현은 계속되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는 그를 보살펴 온 신부님이 자신의 피를 통해 오래 전 멀어버린 눈을 뜨고자 하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보며, 후에는 결국 그 신부를 죽여 버린다. 상현은 노신부를 구원해주지 않았다. 태주는 자신을 사랑하고 구원했다 믿고 있는 상현의 앞에서 지루해하고, 급기야 남편이 자신을 폭행한다고 했던 것은 그녀의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며 악다구니를 내다가, 상현은 태주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 우리는 그 욕망의 속살을 남김없이 목격한다. 그것은 처절하고 볼품없다.

상현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되며, 도리어 만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도자의 윤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현이 빠져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그는 태주가 폭행당했기 때문에, 신부님이 과욕을 부렸기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배고픈 사람 돕기를 좋아했던 환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흡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고 믿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는 효과적이고 한편 군색한 수단이다. 그런데 상현은 이런 포장으로 자신을 보전하거나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는 죄의식과 욕망의 사이에 끼인 존재이다. 그는 성스러운 성인도 아니며, 매혹적인 뱀파이어도 아니고, 오직 이리저리 처신을 바꾼 박쥐, 날개를 가졌지만 흡혈로 생을 유지하기에 해롭고 보잘 것 없고 슬픈 박쥐였던 것이다.

그래서 태주가 폭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거울임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속됨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자신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온 몸으로 성스러운 포장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초라한 속살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고발하였고, 그리고 이 세상을 등지며 자신이 세상에 취할 수 있는 최상의 구원을 행하였다. 욕망은 그렇게 드러나며, 그와 동시에 죽어가야 할 우리의 양날의 검인가. 상현은 바로 이 가장 더러운 곳,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인간의 박쥐같은 모습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공개하였던 것이다.

태주의 욕망 : 갈증(Thirst)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런데 태주의 경우, 그녀의 욕망은 조금 다르다. 태주는 어릴 적부터 라 여사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매우 제한된 삶을 살아왔다. 그녀가 할 수 있던 유일한 것은 맨발로 골목길을 달려보는 것이었을 뿐이다. 태주에게 엄마이면서 시어머니인 라 여사는 철저한 혈연 중심의 사람이다. 태주는 결코 동등한 자식이 될 수 없다. 밀려난 자의, 소외된 자의, 사랑받지 못한 자의 자유로움일까. 그녀는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파괴를 반성하지 않는다. 상현은 자신의 허벅지를 때려가면서 뱀파이어가 되어 생겨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려고 했다. 그는 신부로서의 자신과 뱀파이어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를 움직이는 이러한 죄책감이란 것이 태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주는 늘 체념했으며 늘 분노했고 늘 제어된 채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어떤 것이라도 필요했던 사람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장치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그녀는 욕망을 취해 그것을 즐길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태주에게 욕망은 오직 해방으로만 존재할 뿐, 죄의식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마도 상현이 보고 싶어 했던, 가장 낮은 곳은 태주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녀는 그 욕망에 대한 천진난만함과 당당함 때문에 그만큼 위협적이고 혐오스럽다.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결국에는 제어되어 그녀는 결국 살해당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정당하다. 심지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죽음 따위는 선택할 수 없는 태주에게도 가장 깔끔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그녀에게도 정당하다. 상현은 모두를 위해 가장 낮은 곳의 진실을 삭제한다. 감독의 전작 <올드보이>에서 모든 것이 꿈일 뿐이라고 망각하는 것과 비슷한 시도일까. 한 줌 재도 남기지 않고 가장 혐오스러운 욕망은 감춰지고, 우리의 기억은 지워지려고 한다. 상현의 구원은 인류를 위한 것이어서 정말로 혐오스럽고 천진난만하고 무지한 악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

그런데 태주는 전혀 뉘우치지 않는다. 그녀는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잘 놀았다고, 이제 끝이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여정은 억울하다. 상식이 없어 더욱 무서운 뱀파이어인 태주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파렴치한-쪽가위로 피를 내는 모습을 보라- 연쇄살인마인데, 그래서 짠하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져줘야 하는 존재라서 그녀의 갈증은 무섭지만 짠하다. 그녀가 갈증 앞에 박쥐조차 될 수 없이 천진난만하다는 것과 그렇기에 그 악이 사라져줘야 함이 그렇다. 상식을 배우고, 죽음을 선택하여 존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상현과 비교했을 때, 태주의 모습은 왠지 씁쓸하다. 어디선가 싸이코패스도 잘 자라면 엄격한 지도자가 된다 했던가. 그녀는 잘 자라지 못해 연쇄살인마가 된 싸이코패스 같다. 상현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지막 퍼포먼스가 태주에게는 삶 자체라는 것도 짠하다. 대부분에게 있어 폭력은 감춰지고 은밀하지만, 태주는 가장 더럽고 혐오스럽게도 욕망의 폭력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상현은 태주에게 마지막 구원의 공연을 펼친 것이다. 그 속됨을 드러내는, 그리하여 우리의 성스러운 희망을 무너뜨리고 폭로하며 초라하게 만든 것은 태주를 기억하기 위해 바쳐진 것이었을까.

라 여사의 욕망 - 치명적인 것은 강우이며, 엄마의 시선은 죄의식을 수단으로 강우를 보호한다

그런데 태주가 짠한 것은 영화 내내 가장 공포스러운 엄마 라 여사의 욕망과 그 시선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라 여사는 자기 핏줄이며 아들인 강우에게는 매우 극진하지만, 핏줄이 아니며 딸인 태주에게는 그 수발을 들게 할 뿐이다. 그녀는 아들을 숭배하며, 순수한 혈통을 숭배한다. 그녀는 뿌리 깊게 이어져 왔던 어떤 억압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존재 같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비되어 오직 시선과 정신만 남았을 때 그 힘은 더욱 커진다. 이제 상현과 태주는 그 시선에 사로잡힌다. 상현과 태주를 향해 쉴 새 없이 깜박이는 눈, 그리고 상현이 태주를 죽이고 피를 나누는 때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그 어느 장면들보다도 섬뜩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매우 결정적이다. 라 여사의 시선은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것이 되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현이 스스로 자신의 생을 포기하며, 태주를 끌어들여 함께 사라져 갈 때, 라 여사는 웃는다. 그 시선이 웃는다. 오직 여사의 눈만 남아 있는데, 그 눈이 매우 크게 눈웃음 짓는다. 마치 승리했다는 듯이. 그것은 매우 사악하고 섬뜩하게 그녀의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여사의 눈웃음이 주는 사악함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러한 눈웃음이 없었다면, 상현의 죽음은 우리에게 욕망과 죄의식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도덕만을 남겼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이전 복수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죄의식의 승리였다. 그런데 오직 그러한 제어 즉 금기를 당연한 운명으로 느끼며 주인공들의 여정이 끝나간 뒤에, 우리는 <박쥐>에서 라 여사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갑자기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그녀가 지배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환기일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피를 숭배하는 여사의 억압에 대한 환기이다.

이러한 시선의 살아남음을 보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 수많은 피와 그 화려하던 욕망의 풍경들은 결국 죄의식 앞에 고개를 숙이고 혀를 잘랐고(<올드보이>), 욕망의 모습이 그럴싸하고 설득력 있을수록 죄의식 앞에 주인공의 무력하기만 했다(<친절한 금자씨>). 여기서 금기는 운명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탐한 자들은 망설임 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 여사의 시선을 함께 봄으로써 우리는 그 낮고 더러운 욕망을 더러워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 선, 즉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며 단지 뿌리 깊을 뿐일 수 있는 어떤 억압의 선을 비로소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욕망에 의해 치명적으로 파괴되는 것은 오직 혈통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이 세 번째 욕망이 있음을 확인했을 때, 우리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편적인 인간 일반을 향한 것이 아닌, 강우였음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현과 태주가 죽어가야 했던 것은 그들이 강우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피가 섞이는 것은 더럽다. 그리고 그 욕망은 추악하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피와 피의 나눔을 두려워하고 그것의 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애초에 억압하는 것이 있었음을, 그리하여 그것에게 치명적인 것이 피와 피가 섞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상현과 태주의 죽음은 비로소 짠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가장 더러운 것을 비로소 편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 초라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라 여사가 없다면, 모든 위계가 사라진 욕망의 향연만이 영화에 남을 것이다. 그때의 욕망이란 생의 파괴와 닿아 있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욕망의 배치는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거나 평평하지 않은 것 같다. 실로 우리네 욕망은 위계 속에서 배치되고 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상현이 스스로 초라한 모습을 연기하고 기꺼이 초라해짐을 택했을 때, 그것은 진정 가장 낮을 곳을 구원하기 위한 공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낮은 곳의 욕망은 철저히 억압되었기에 반대로 솔직한 채로 보존되었고, 상현의 공연으로 그것은 우리 눈앞에 정면으로, 전면적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현은 연기할 수 있었을 뿐 살아낼 수는 없었던 그 낮은 삶을 태주는 위풍당당하게 살아낸다.

어쨌든 파괴되었어야 할 시선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느 박쥐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욕망이 우리 내부에 도사린 위험이나 파괴요소가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향한 위험이라는 진실이다.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것은 내부에 도사린 충동이라기보다는 어떤 분노이고 이 분노는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감독은 마치 그 말을 하고 싶다는 양 여사의 살아남은 시선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박쥐>는, 현실의 운명이란 상현과 태주의 여정을 짧은 일탈로 매듭짓게 할 수밖에 없으나, 한편 그것이 라 여사가 꿈꾸는 운명일 뿐임도 폭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욕망이란 단지 내부의 어두운 충동이고 억제되어야 하는 보편 윤리로써 해석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혈통의 지배를 깨는 즐거운 섞임의 과정이라는 것을, 때문에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일 수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실로 인간의 역사에서 지난한 세월동안 우리 중 대부분은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지 못한, 단지 더럽고 무지한 존재로 머물기를 강요당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은 욕망의 독점이었던 것이다. 그 지난한 전통의 라 여사 시선 속에서 다수는 실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피의 섞임이란, 그 처절한 나눔이란, 혐오스럽기보다는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로소 라 여사가 아닌 우리를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라 여사는 정녕 파괴되어야 할 역사이며, 그러므로 이제 박쥐임을 인정하는 것은 혐오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솔직하고 즐겁게 도래하는 인류의 역사를 향한 것이 될 때이다.

Posted by gipsymoon
글쓰기2011/04/16 12:56
(2008.8월)

어릴 적부터 우리는 수많은 스크린 속 영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초인적인 능력과 좋은 마음씨를 무기로 악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대다수의 영웅들과 달리 배트맨만은 초인이 아니었다. 배트맨의 능력은 그의 몸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그는 외계인도 아니며, 방사능 물질에 노출된 돌연변이도 아니고, 인간의 진화를 증거하는 이도 아니다.
브루스 웨인이 영웅이 된 이유는 어릴적에 강도에게 죽어가는 부모를 목격해야 했다는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은 배트맨이 출현한 동기를 설명한다. 그러한 동기를 낳은 고담이라는 그 가상의 도시사회는 음침한 부패로 가득하다. 두 번째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소년을 배트맨으로 만든 것은, 브루스 웨인이 고담시에 횡횡하는 수많은 범죄들에 대응할 만한 자본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소유한 무기들은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한 기술의 성과물이다. 이렇듯 배트맨을 탄생시킨 것은 ‘범죄-부패’와 ‘부-자본’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고담시라는 도시 공간을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배트맨 시리즈의 진정한 주인공은 고담시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배트맨은 부패한 사회에 의해 어린 시절을 빼앗긴 고담의 어둠의 자식이자, 고담시의 부를 거머쥔 고담의 빛의 자식이다. 이 두 가지 모순이 그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다. 배트맨의 탄생은 고담-도시적이다.

이제 고담시가 나은 <배트맨2>의 또 다른 어둠의 자식들을 보자. 펭귄맨은 흉측한 외모 탓에 부모로부터 하수구에 버려진다. 그리고 그는 도시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모여드는 하수구의 왕으로 자란다. 그는 한 때 사람으로서의 자기 이름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 시도는 맥스 쉐릭이라는 기업가에게 이용당하기도 하거니와 이미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을 버린 도시를 향한 저주를 시작하고 도시를 파괴해 버리고자 한다.
캣우먼 역시 또 한 명의 버려진 자이다. 그녀는 직장 상사에게 살해당하고, 배트맨에게도 살해당한다. 그녀가 처음 살해된 것은 회사의 비리를 알았기 때문이며, 그녀가 캣우먼으로 부활하자마자 한 일은 뒷골목에서 한 여자를 강간하려고 하던 남자를 처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캣우먼이 되어서도 그녀는 배트맨과의 싸움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 눈치껏 커피나 따르고,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하며, 육체적으로도 꼼짝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여성 셀리나의 분노는 자신을 죽게 만든 남성 맥스 쉐릭과 배트맨에게 향한다.

조금씩 다른 정체성 속에서도 배트맨, 펭귄맨, 캣우먼의 공통점은 그들이 사회의 부패로부터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는 경험에 있다. 그리고 <배트맨2>에서 그 어둠의 자식들이 공통적으로 만나는 고담의 악당은 바로 맥스 쉐릭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배트맨이 맥스라는 작자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배트맨이 처음부터 범죄의 낌새를 느끼고 주목하는 상대는 펭귄맨이다. 물론 눈에 드러나는 범죄는 펭귄맨이 저지른다. 펭귄맨의 테러를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펭귄맨이 테러리스트라면 맥스는 교활한 음모가인데, 배트맨이 이를 대하는 방식을 보고 싶은 것이다. 배트맨에게 펭귄맨은 명백한 범죄자지만, 맥스 쉐릭은 그저 거절 대상일 뿐이다. 또한 맥스를 법의 심판에 맡기려던 배트맨은 캣우먼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캣우먼은 두 번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분노의 크기 때문이었을까, 배트맨과의 해피엔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로 그가 내미는 손을 거절하고 만다.
배트맨은 맥스를 상대적으로 간과했으며 다른 두 괴물이 맥스에게 뿜는 분노의 크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도시를 파괴하는 괴물들을 막으러 다니느라 그들을 파괴한 도시의 지배자를 벌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배트맨과 다른 도시의 괴물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인 듯하다. 여기서 악당의 상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배트맨과 펭귄맨은 어떤 차이가 있기에 한 명은 도시를 지키는 영웅이 되고 한 명은 악당이 되며, 또 배트맨과 캣우먼은 어떤 차이가 있길래 함께 해피엔딩에 이를 수 없는 것일까.

브루스 웨인을 어둠으로 이끌고 괴물로 만든 것은 도시의 부패 혹은 타락이다. 브루스 웨인의 상처는 이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은 결코 타락한 무리에 속해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곪은 과거 상처를 제외하고는 고담의 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펭귄맨이나 캣우먼의 경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펭귄맨은 부패된 도시의 희생자지만 그 스스로가 도시의 부패된 것으로 정의된다. 그는 어둠에 생채기 난 것이 아니라 어둠의 장소에 버려진 자로, 도시의 부패가 모여드는 장소를 터전으로 산다. 우리 사회에서 집을 잃고 가장 더러운 곳이나 지하로 모여드는 자들은 빈민이나 노숙자 등으로 불린다. 혹은 외모로 인한 차별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직면한 이슈이기도 하다. 펭귄맨의 모습은 이러한 도시의 냄새나고 더러운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그는 도시의 일원이 아니라 그들이 버리고 싶어 하는 것들의 왕이며, 도시의 빛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한 자이다.
캣우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리버리하고 순진한 비서이자 부스스한 노처녀인 그녀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은 비단 고담시라는 가상공간만의 것이 아니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미모도 없는 애매한 여성에게 현실은 가혹하다. 그녀의 집에서 창밖으로 빛나던 'Hello there'란 조명은 캣우먼이 된 그녀에 의해 'Hell here'로 바뀐다. ‘안녕하냐’는 상냥한 인사는 ‘지옥같다’는 외로움과 화를 애써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펭귄맨과 캣우먼에게 있어 어둠은 도시의 부패가 아니라 도시 그 자체가 부여한 것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점은 배트맨과 이들의 대립을 설명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배트맨에게 도시는 아직 희망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는 도시로부터 그 자격을 인정받는 자이다. 즉 배트맨에게 있어 도시는 삶의 장소이다. 그러나 펭귄맨이나 캣우먼에게 도시는 증오의 대상이다. 그들은 도시의 타락으로 인해 상처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버려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고담시는 절망을 안기는 죽음의 공간인 것이다.

그 차이는 이들이 싸우는 방식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세 괴물들은 모두 자신의 재산을 무기로 삼는데 배트맨에게 그것이 기술이라면, 펭귄맨과 캣우먼에게 재산은 자신들의 일부인 동료나 몸뚱이다. 배트맨이 사용하는 것은 그의 무기일 뿐이지만, 펭귄맨은 그의 동료(?)들을 동원하고, 캣우먼은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동원시킨다. 배트맨이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면 나머지 둘에게 이 싸움은 죽음을 불사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트맨은 고담시의 영웅이 될 수는 있지만, 고담이 해친 자들의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영화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배트맨2>는 이러한 도시의 진실을 너무도 잘 드러냈다. 고담시에서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던, 즉 실제적으로는 시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은 도시의 파괴였으나,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캣우먼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맥스에게 복수할 때, 펭귄맨이 자신의 아지트에서 털썩 엎어지며 생을 마감할 때, 마음이 같이 주저앉는 것은 그 진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버려지는 자와 살아남는 자에 관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정확히 은유하고 있어 이 영화는 그만큼 파괴적이다.

그래서 <배트맨2>에서 고독한 배트맨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좋은 시민이 볼 수 있는 것이 이미 시민된 자들의 안녕일 뿐인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이다. 펭귄맨의 죽음과 캣우먼의 언해피엔딩은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펭귄맨이 마지막에 우산을 뽑아든 그 의지와 캣우먼이 배트맨의 손을 거절한 것은 스스로를 격려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쓰러지는 중에도 화해의 청을 거절한 그 분노를 우리는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배트맨2>에서 배트맨이 보인 활약(?)은 고통에 무기력한 휴머니즘 혹은 편들기에 실패한 양심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도시의 빛을 먹은 배트맨의 태생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펭귄맨이나 캣우먼이 어둠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면, 배트맨은 고담을 파괴를 감수할 만큼 그 어둠에 응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는 승자도 영웅도 없다. 고담시의 실체만이 우뚝이 드러났을 뿐이다.

Posted by gipsymoon